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칠원 향교에 소장된 자료는 모두 174건으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료가 대부분이다. 본 조사를 통해 김해지역 자연마을의 근대화를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본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자료는 총 251점이다. 조사자료 가운데에는 교육교재가 총 91점으로 가장 많다. 나머지 자료는 모두 낱장 자료들이다. 자료 목록을 정리, 업로드한 2010년 3월 현재 고문서는 모두 사료건으로 지정하게 되어 있어서 성책류, 장부류도 일단 모두 사료건으로 삼았다. 사료의 원본은 현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 있으며 ,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스캔한 이미지 원문 자료만 있습니다. 한편 일부 내용은 LexisNexis사에서 UPA collection의 일부로 Office of the Assistant Secretary of for International Affairs Geographical Files: The Far East, 1944-1959 라는 이름으로 마이크로필름으로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편에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한국 관련 내용은 총 21개 롤이다. 이에 따라 마을 공동체 관련 자료, 새마을 운동 관련 자료, 관의 각종 공문서 등이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다. 공주군과 함께 추진한 백제문화제, 각종 문화행사, 교양강좌, 공연, 영화상영, 신년교례회, 소식지, 공주직업청소년학교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 자료는 주로 1910년부터 1953년까지의 당시 뉴욕 주재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 중 한국 선교 관련 문서를 묶은 것이며,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현재의 미국 연합 장로교회(PCUSA: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의 전신이다.

칠원읍지에 의하면 縣의 서쪽에 있던 건물을 인조 원년(1623) 현의 동쪽 校洞으로 이건했다가 영조 36년(1760)에 현재의 함안군 칠원면 용산리 299번지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이에 교임을 맡고 있던 李在淵, 黃龜淵, 裵文翊 등이 보수를 위해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한달동안 3백냥을 모금하여 수리를 마치게 되었다. 한편 통문 등에 나타난 칠원 지역의 성씨로는 尙州周氏, 金海裵氏, 廣州安氏, 玄風郭氏, 咸安趙氏, 昌原黃氏, 晉陽姜氏, 長水李氏, 仁川李氏, 陽川許氏 등이 향교의 활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종12년(1846) 현감 孫亮錫이 부임이후 퇴락한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때에 周相文, 黃瀞 등 지방 사족의 도움을 받아서 토목 공사를 마감하였다. 고종 15년(1878) 현감 金尙鍾은 성전에 비가 세고 담장이 무너졌으며 동서재의 기와가 걷혀 기둥이 휘어지고 문과 벽이 성한 곳이 없는 향교의 모습에 개연함을 느끼게 되었다. 고종 28년(1891)에는 현감 李承遠이 성전에 부임하여 배알한 후 월급을 내어놓고 유림들에게 모금한 1,500金을 가지고 동서재와 풍화루, 양현, 전사 등을 수리하였으며, 제기와 제복도 새롭게 마련하였다. 1640)에 대한 것으로 輓詞ㆍ祭文, 權斗仁이 쓴 墓碣銘 등을 묶은 것이다.

그날 본인의 행적, 방문자 이름,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의 이름 등을 써놓았을 뿐이지 만나서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후손들 가운데 과거 합격자가 다수 배출되었으며, 19세기 중반까지 향촌 주민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상 19세기 후반의 분쟁은 관련 매매문기 등도 함께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중 비중있는 몇몇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군수가 향교재산의 수입 관리, 교화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령은 성경호가 매매문기를 위조한 것으로 판결하였고 이규조와 성경호는 手票를 작성하여 다시는 소송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여기에는 兩家의 분묘가 가깝기는 하지만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서로 마주하지 않았다는 점이 한가지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61)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윤시영이 按覈使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이에 발생한 수입, 지출에 대한 결산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한국관련 부분에는 윌리엄 원이 주고 받은 전신과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프란체스카로부터 온 편지, 국내 관료들로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동향을 보고 받은 것 등이 있음. 여기에는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주고 받은 서한, 선교위원회에서 회람된 편지, 교육 및 의료 활동 기록, 개인 서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듬해 아펜젤러(Appenzeller)와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이 입국해 의료 사업과 영육 사업을 개시함으로써 감리교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이 조직에서 해외 선교에 필요한 계획과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선교 지역 및 선교사 선정 등의 업무까지 관장하였다. 소장 자료 중에서 고문서로는 通文, 稟目, 帖文(諭), 傳令, 訓令 등의 순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수업료 등의 學則을 담은 구체적인 자료이다. 동래 범어사(梵魚寺)는 명정학교(明正學校, 1906년)를 설립하였는데, 오늘날 청룡초등학교(공립)와 금정중학교(범어사재단)로 그 맥이 계승되고 있다. 칠원향교는 1906년 칠원군이 함안군에 통합되면서 함안향교에 병합되었다. 고종32년(1895) 5월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나 광무 10년(1906) 9월 칙령 제 95호에 의해 구산면을 제외한 칠원군 전체가 함안에 병합되었다. 인천오피 , 5월 5일 정윤호가 변오석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변오석 등은 다시 정소하여 정윤호가 이장할 뜻이 없는 것이라며 官掘을 요청하였다. 제3책이 결본이고 필사본이다. 또 저자와 간행연도를 알 수 없는 《董賈餘祿》 1책이 있다. 각각의 사료명은 소장자가 붙인 제목을 그대로 옮겼으며, 별도로 제목이 없는 경우에는 자료의 내용을 감안하여 임의로 작제하였다.塗壁 보인으로 1명이 배치되어 있으며 뒤에 齋直案ㆍ戶房案ㆍ奴婢案에 각각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다.